능력 있으면 출신지 안따지고 기용…국가 업그레이드
국태민안 내세워
통치…백성들의 자발적 참여 이끌어내
신라 황금기를 만들어낸 진흥왕(재위 540~576)의 출발은 불안했다. 백부이자 외조부인 법흥왕을 이어 불과 일곱살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법흥왕은 율령반포, 불교공인 등을 통해 국가체제를 갖췄고 가야 일부까지 통합, 융성기를 열었다. 신라는 이제 강력한 후계자가 나서서 고구려·백제와 본격적으로 경쟁해야할 시기였다. 그런데, 코흘리개 나이의 진흥왕이 태후의 수렴청정을 받으며 등장하였으니 신라로선 위기였다.
하지만 기우였다. 진흥왕 재위 당시 신라는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대가야를 통합하고 한강 유역및 대중국 교역지인 서해안의 당항성과 함경도 일부에까지 영토를 넓혔다. 거대한 황룡사를 짓고 승통(僧統·최고위 승려)을 두어 승려들을 통솔하며 화랑도를 조직하는 등 종교 사상 면에서도 큰 진전을 이루었다. 광개토대왕처럼 용맹한 영웅도 아니었고, 강렬한 카리스마를 지닌 군주도 아니었던 진흥왕이 신라를 극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비결은 진흥왕의 인간경영에서 찾을 수있다. 그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고 능력있는 신하들을 적재적소에 활용함으로써 인간 경영에 성공한 리더였다. 진흥왕은 통치 목표와 비전을 분명하게 제시함으로써 신민(臣民)들의 공감을 얻었으며, 인재를 소중하게 여기면서 끝까지 신뢰했다. 진흥왕의 성공은 그의 절대적 신임을 받았던 신하들의 노력에 의해 이뤄진 셈이다.
당시 국제정세도 신라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6세기 중엽 돌궐의 침략을 받은 고구려는 남쪽 국경인 한강 일대의 군대를 서북국경으로 돌려야 했다. 고구려는 신라와 밀약을 맺고 충돌을 피하면서 남한강 유역을 신라가 차지하도록 했으며, 백제군의 공격에 밀려 한강하류도 내어주었다. 하지만 이후 신라가 한강 하류의 백제군을 격퇴하고, 고구려의 동남 해안까지 치고 올라간 것을 보면 진흥왕의 리더십을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진흥왕이 제시한 국가비전은 삼국통합이었다. 사실 상대적으로 후진국이었던 신라는 삼국간의 경쟁구도에 대책없이 안주하는 한, 국가를 보존할 가능성조차 거의 없었다. 진흥왕은 이런 현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천하를 불법(佛法)으로 통일했다는 불교의 전륜성왕(轉輪聖王) 이데올로기를 받아들였다. 자기 아들들의 이름을 동륜(銅輪) 사륜(舍輪) 등으로 지은 것은 동이(東夷)세계를 통일하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밝힌 것이다. 북한산은 물론 황초령 마운령 등 북방 영토까지 수레를 몰고 직접 돌아다닌 것도 백제와 고구려 영토를 통합하겠다는 비전에서 나왔을 것이다.
진흥왕은 백성들의 복리를 으뜸에 놓는 ‘국태민안(國泰民安)’도 통치 목표로 제시했다. “세상의 도리가 진실에 어긋나고 그윽한 덕화(德化)가 퍼지지 아니하면 사악함이 서로 다툰다. 고로 제왕은 연호를 세우고 스스로를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하지 않음이 없다.” 재위 29년(568)에 세워진 황초령순수비(함흥) 내용이다. 이런 목표는 재위 중 그가 내세운 연호인 개국(開國· 나라를 엶) 대창(大昌·크게 번창함) 홍제(鴻濟·큰 다스림)에도 드러나있다.
진흥왕은 삼국통합과 국태민안(國泰民安)이란 국가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인재를 중시하고 잘 활용했다. 현전하는 신라 시대 금석문을 살펴보면, 진흥왕 대에 활동한 인재들이 삼국 통일 이전 신라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을 정도다. 우선 인재의 기용은 포용적이었다.
전통 귀족들을 세력기반으로 계속 활용한 것은 물론이고, 김유신의 조부이자 가야계인 김무력을 중용했고, 고구려에서 귀화한 승려 혜량을 당시 신라의 정신적 지주인 승통으로 삼았다. 가야 출신 우륵의 음악을 받아들임으로써 신라 음악을 한단계 끌어올렸다. 진흥왕 대의 르네상스는 이처럼 다양한 외부 인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임으로써 신라의 국가 수준을 업그레이드 한 결과다.
진흥왕의 인재발탁에는 눈여겨 볼 점이 또 있다. 그는 즉흥적으로 사람을 기용하는 대신, 인재 양성과 발탁을 제도화했다. 화랑도가 대표적이다. 학교도 제대로 없고, 인재 선발 제도도 갖춰지지 않은 당시에, 소년들을 모아 자연속에서 호연지기를 기르게 하고 능력과 덕망있는 자를 찾아내 기용하려한 것이다.
능력있는 인재들에 대한 보상은 후하고, 철저했다. 가야 토벌에 공을 세운 화랑 사다함에게는 본인의 간곡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200명의 포로와 넓은 토지를 내렸다. 순수비에는 “충성·신의·정성을 갖추고 나라에 충절을 다하여 공을 세운 자들에게 벼슬과 상품으로 표창하고자 한다”라고 명기했다. 충분한 보상을 통해 충성심을 한껏 고양시켰음을 알 수 있다. 단양 적성비(약 551년)에도 성을 쌓다 순직한 지방인 야이차(也▩次)의 유가족을 포상하는 내용이 기록돼있다.
진흥왕은 자신이 발탁한 인재들을 끝까지 신뢰했다. 신하 중에는 노년에 이르도록 크게 활약하면서 이름을 날린 이들이 적지 않다. 장군이자 정략가인 이사부는 진흥왕 2년 병부령이 된 이래 20여년간 군사책임자로 있었다. 이사부는 553년 당시 갓 스물이었던 패기만만한 진흥왕과 호흡을 맞춰 한강 유역 백제군에 대한 기습에 성공함으로써, 한국사의 흐름을 바꿨다. 국사 편찬 책임자였던 거칠부(502~579)는 남한강 유역 정복 작전에서 장군으로 활약했으며, 이사부를 이어 정치·군사 책임자가 되어 진흥왕 후계자인 진지왕의 후견인 역할을 할 만큼 신임을 받았다.
금관가야 왕자로서 귀화인에 불과한 김무력도 한강유역을 차지하는 데 큰 공을 세우고 신주(新州)의 군주(軍主)가 되었으며, 그의 부하들은 백제군을 물리치고 성왕을 죽였다(554). 왕의 신임을 한 몸에 받은 무력의 집안은 신라의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분명한 통치 목표와 비전, 신하에 대한 포용력과 신의를 갖춘 진흥왕은 약소국 신라의 구심점이 됐다. 진흥왕의 리더십은 신민들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최선을 다하게 하여, 삼국 통일을 달성하는 기초를 닦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김기흥 건국대교수·한국사)
------------------------------------ 진흥왕의 탁월한 외교력
남한강 유역 큰싸움없이 고구려서 넘겨받아 ------------------------------------------
고구려는 551년 돌궐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한강 유역을 백제와 신라에 내줬다. ‘삼국유사’에는 백제가 신라와 함께 고구려를 칠 것을 청하자, 진흥왕은 고구려가 두려워 이 사실을 고구려에 알려 환심을 샀다고 기록돼있다. 신라 고구려간 밀약의 가능성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이것은 642년 고구려 보장왕이 백제의 침략을 막기 위해 도움을 청하러 온 김춘추에게 본래 고구려 영토인 조령·죽령 일대의 땅을 내놓으라고 한 사실에서 보다 분명해진다. 고구려가 옛 영토를 돌려 달라고 한 것은 진흥왕 때에 이 땅을 신라에게 내 준 사실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와 밀약을 맺은 고구려는 우호적인 약소국 신라에 대해서는 손쉽게 남한강 유역을 내 주었고, 숙적 백제와는 치열하게 싸우며 한강 하류를 내준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 내준 영토는 쉽게 수복할 수 있으리란 생각과 더불어 신라가 백제를 견제해 줄 것을 요구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구려는 물론 백제도 신라를 너무 과소 평가했다. 특히 성왕을 위시한 백제 집권층은, 실리(實利)가 우선일 수밖에 없는 국제관계와
신라의 국력과 비전에 대해 안이한 인식을 가졌다. 결과는 성왕의 죽음뿐 아니라 망국의 비극으로 이어졌다.
[출처 - 푸른장미의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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