公論정치 통해‘유교권 중심국가 건설’운동 전개
‘新국가
비전’사대부들에 큰 반향… 사회운동으로 발전
속담에 ‘잉어가 뛰니까 망둥이가 뛴다’는 말이 있다. 잘난 사람 흉내내는 못난 사람 행동을 말하지만, 역사적으로는 어지러운 난세의 조짐이다. 통치자가 잉어와 망둥이를 구별하지 못하면 바로 난세가 된다.
17세기 조선은 난세였다. 청나라 침략에 굴복한 인조는 삼전도에 끌려나와 무릎을 꿇어야했다. 어지러운 시절을 틈타 친청파(親淸派) 망둥이들은 이리저리 마구 뛰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인재들을 과감히 기용, 조선을 붕괴 직전에서 구해내고 새로운 국가비전을 제시한 인물이 바로 조선의 17대 왕인 효종(1619~1659, 재위 1649~1659)이었다.
효종의 청년기는 참혹했다. 병자호란 여파로 열여덟의 나이에 1637년 형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잡혀간 그(당시 봉림대군)는 8년간 볼모생활을 감수해야했다. 청나라가 중원을 정복하기위해 군대를 움직일 때마다 자기 뜻과 무관하게 서쪽으로는 몽골, 남쪽으로는 산해관 등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녔다.
효종은 원래 임금이 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 심양에서 인조를 대신하여 작은 파견 정부(分朝)를 이끈 사실상의 작은 군주였다. 소현세자는 국제 감각도 있었고, 청나라 내부 사정도 익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1645년 귀국 두달만에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다. 반면 효종은 아부꾼들과 친밀하게 지내고 하인들에게 무시당하기도 하는 등 심양에서의 행동거지에 말이 많았다. 게다가 친청파 김자점이 가장 적극적인 효종의 즉위공신이었다는 사실도 뜻 있는 많은 사람들을 우려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당시 친청파 김자점 일파는 청에 붙어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했다. 김자점은 인조반정 공신이기도 했다. 이시백 등 다수의 반정공신들과 함께 명망있는 이항복의 문하생이었던 김자점은 청나라에 항복하여 통역관을 담당했던 정명수까지 자기 편으로 만들었다. 반정공신들 중에는 김상헌 이시백 같은 강력한 반청파도 있었지만, 당시 친청파 김자점의 인맥과 친화력에서 나오는 권력은 누구보다 막강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즉위한 효종은 10년 남짓한 재위기간 중에 이후 수백년간 지속된 조선왕조 통치권의 정통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의 선택은 단호하면서도 용의주도했다. 효종은 즉위하자마자 일반적인 생각을 완전히 뒤집어버리는 조치를 취했다. 청의 강압적인 내정 간섭 상황에도 불구, 아버지와 자신 모두의 즉위 공신인 친청파 김자점과 그 심복들을 과감히 제거했다. 하지만 대대적 숙청은 피했다. 김자점 집에서 압수한 많은 사람과 주고받은 편지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고 소각, 연루자를 최소화했다.
효종은 김상헌을 위시한 반청파 인사들의 궐기를 유도했다. 이후 몇백년간 이어지는 통치담론을 만들어낸 김집-송시열-송준길-권시로 대표되는 원칙적인 경도(經道)에 밝은 산림학자들 뿐 아니라, 당면한 국가 사업들을 현명하게 처리한 이경석-김육-정태화-허적으로 이어지는 실사구시에 입각한 권도(權道)에 밝은 실무관료들을 대거 기용했다. 군사 업무에 밝은 이시백과 이완 같은 인물들을 등용한 것도 이때다. 조선왕조실록은 “무릇 이름 있는 선비는 찾아서 등용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선비를 지극히 높임이 시종 한결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들은 이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대동법을 통해 조세제도를 전면 개혁했고, 반청(反淸)·북벌(北伐)론을 내세워 군대 양성에 나섰다. 그러면서도 청나라와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는 외교 정책을 펼쳐 파국을 막았다.
효종이 이런 인물들을 기용해서 추진한 핵심 사업은 새롭고 독자적인 조선국가 건설운동이었다. 소위 ‘춘추대일통(春秋大一統) 사업’이었다. 당시의 조선을 만주족이 정복한 중국을 대신해 동아시아 유교문화권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중심국가로 만들겠다는 계획이었다. 효종은 이를 위해 조선 왕조의 국가 모델을 근본적으로 개혁했다. 중국의 통일 왕조인 한(漢), 당(唐), 송(宋), 명(明) 국가체제 지향에서부터 여진족과의 대결 체제인 남송(南宋) 국가체제 지향으로 전환했던 것이다. 여기에서 중국족에게 진 은혜와 여진족에게 진 원한을 갚는다는 주자성리학에 입각한 그 유명한 존주북벌론(尊周北伐論)이 나왔다. 비록 조선 국가의 힘, 그리고 통치자 개인의 힘이 미치지 못하여 당시 세계 중심인 중국에까지 펼치지는 못했으나, 우리나라에 펼치기에는 큰 부족함이 없었다. 문화적으로 보면, 조선 제일주의에 입각한 자존의식이 강화됨으로써, 후일 동국진체, 진경산수 같은 독창적인 예술 세계들이 선보이게 됐다.
효종 시대에는 서인과 남인 붕당간의 견제와 균형을 통한 조화로운 붕당정치가 실시됐다. 이를 위하여 성리학 지도자인 재야 출신의 ‘산림(山林)학자’에게 관료와 임금의 스승이라는 직책을 주어 최고 정책결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제도를 확립했다. 또한 언론·학술·감사·역사기록을 담당하는 청요직(淸要職)의 독립성을 보장했다. ‘청요직’은 고위직은 아니지만, 맑고 중요한 직책이라는 뜻이다. 국정 전반에 대해서 사대부들의 여론을 적극 반영하는 공론정치도 활발하게 전개했다. 기존 정치가와 산림학자 사이에서는 붕당이 달라도 학문교류와 혼인 관계를 통해 학연이나 혈연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이뤄졌다. 효종 당시 서인 지도자 송시열, 송준길과 남인 지도자 권시는 절친한 친구였고, 혼인관계로 연결돼있었다. 효종은 문약한 조선의 분위기를 일신, 사대부들의 기풍을 바꾸려고 시도한 무사(武士)적 성격의 통치자였다. 송시열에게 요동정벌에 쓰기 위한 담비 갖옷을 하사한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었다.
효종의 신국가건설운동은 사대부들에게도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지방에서도 사대부 집안으로 내세울만한 명분(유가명분·有家名分)에 입각한 새로운 가문 건설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모든 집안이 각각 그 집안의 상징인 명분과 충의(忠義)를 보존함으로써 사람마다 각자 자기의 근본을 알게 하자는 사회운동이 전개됐다. 세상이 타락해 갈 때 ‘자기 재주를 숨기는 것’으로 덕목을 삼음으로써 올바른 예의와 염치를 제대로 세우려 한다든지, 강인하고 온유한 덕목을 공동체 생활에서 실천함으로써 자기 시대를 넘어서는 어른으로 인정받은 산림처사(山林處士)적 인물들이 줄을 이었다.
효종은 “위태로운 국운을 구제할 뜻이 있어 왕위에 있은 지 10년 동안 하루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효종이 남긴 자취는 구한말 고종대까지 ‘효종’의 혈통을 잇고 효종이 못 다한 사업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점이 강조될 정도로 오랜 영향을 미쳤다.
효종은 정통성 있는 통치 담론을 확보함으로써 난세를 극복하고 새로운 국가 건설운동을 펼친 개혁가였다. 이는 케네디 대통령이 1960년대 새로운 미국의 건설을 내세우면서 ‘뉴프론티어’ 운동을 펼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효종은 조광조와 함께 조선 역사에서 통치 권력의 정통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천으로 보여준 대표적인 인물이다.
(박광용 / 가톨릭대 교수·국사학 parkky55@hanmail.net )
--------------------------------------- ●효종의 사람들송시열 통치이념 설계…김육은 경제개혁 주도 ----------------------------------------------
![]() | |
▲ 송시열(왼쪽), 김육 | |
이시백같은 강직한 인물도 있었다. 자기 집의 유명한 꽃나무(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를 궁궐에서 가져가려 하자 “임금께서 사람을 구하지 않고 꽃나무를 구하시니 큰일이다” 하면서 꽃나무를 뽀개버렸다. 이후원은 친구들의 인사청탁을 철저하게 거부하는 바람에 ‘왕따’를 당하기도 했다. 효종 시대는 바로 이런 사심(私心) 없는 인물들을 발탁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출처 - 푸른장미의 사랑]
'정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7> 고려 숙종…지지받지 못한 개혁 (0) | 2005.03.28 |
---|---|
[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6>의자왕의 근시안적 리더십 (0) | 2005.03.28 |
[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4>고려 충선왕-실패한 理想군주 (0) | 2005.03.28 |
[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3> 고구려 소수림왕의 리더십 (0) | 2005.03.28 |
[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2>조선 태종-결단의 리더십 (0) | 2005.03.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