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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4.19혁명

아이네로 2005. 4. 19. 09:41

 

 

 

1. 4.19혁명 당시의 시대적 배경

 

(1) 정치적 배경

 

 

이승만 정권은 출범 초부터 국민들의 진정한 소리를 외면하고 강력한 권력 구축과 정권연장을 위한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이승만은 자심의 미약한 국회 내 기반을 다지기 위한 작업부터 시작했다. 국민의 정당과는 거리가 먼, 권력 강화 수단으로 만든 정당인 자유당이 등장한 것은 1951년이다. 친일파를 모아 만든 자유당은 이승만 독재의 철옹성이 되어, 갓 태어난 신생 공화국의 민주주의를 말살해 갔다. 1952년 이승만은 국회에서 이미 부결된 정·부통령 선거제와 양원제 개혁안을 다시 제출, 직선제를 통한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만들었다. 1954년 3선 개헌안 제출과 표결에서의 사사오입이라는 억지가 정치판에 등장하기도 했다. 자유당은 아무 것도 두려울 것 없는 독재 권력의 방패로 이승만 정권을 지탱하는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 국회는 자유당의 독무대가 되었고 민주주의를 외치던 인사들은 엄청난 고통을 견뎌 내야 했다. 1958년 8월에는 야당과 언론을 억압하기 위한 국가보안법 개정안이 등장, 정계를 다시 뒤흔들었다. 이 보안법 개정안이 자유당 단독으로 통과됨으로써 공포정치의 정국이 계속되었다. 1960년 이승만과 이기붕을 동반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 선거 획책은 민심을 폭발시킨 기폭제가 되었다.

 

(2) 사회 경제적 배경

 

 

4.19전야의 한국 경제는 식민지 반봉건성과 관료매판적 종속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파국의 국면이었다. 정치권력과 결탁한 매판자본가들은 상업이윤으로 살찌는 반면 정치권력을 장악한 정치관료는 권력을 富로 번화할 수 있는 힘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 원조 물자에 기생하여 고도로 서구화된 생활을 영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일반국민, 특히 농민과 도시의 영세민 그리고 고등교육을 받았으면서도 일자리를 얻지 못한 고등실업자들은 <보리고개>니 <쌀고개>니 하는 단경기를 맞을 때마다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또한 관료매판자본가들이 원조에 기생하여 국민대중보다 현저히 잘 사는데서 오는 상대적 빈곤의식이 극심해 졌는데, 상대적 빈곤의식은 인플레이션의 누중, 조세 부담률 증가 및 실업률 증가, 특히 고급인력의 취업률 저하로 더욱 심화되었다. 이것이 학생과 민중으로 하여금 독재, 부정, 부패 등 정치적 모순과 수득 불평등, 취업의 제약, 실질적 신분의 제약 등 사회경제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저항의식을 싹트게 한 것이다

 

2. 4.19의 전개과정

 

(1) 2.28데모

 

 

1960년 2월 28일 낮 1시 대구 경북 고교생 8백여명은 학원의 자유를 외치며 데모, 뒤이어 대구고 8백여명, 경북여고 1백여명 참가 2.28데모는 온갖 어용조직에 묶이고 공포에 짓눌려오던 학생들의 자유혼을 흔들어 깨운 계기가 됨

·3월 5일 : 오후 5시 30분, 민주당 유세 직후 학생 등 1천여명 데모

·3월 11일 : 치안국장 이강학 '학생데모에 개전의점이 없으면 선거후에 입건'경고

·3월 12일 : <워싱턴 포스트>지에 '너무도 광범위한 억압'이라고 한국 政情보도

·3월 14일 : 오후 6시 부산 동래고, 항도고, 부산상고, 북부상고, 테레사여고 등 1천여명 데 모, 밤 9시 서울 고교생 1천여명 산발적으로 데모

·3월 15일 : 제 4대 정·부통령 선거, 오전 10시 마산시장 선거 무효 선언

낮 1시 30분 민주당 경남도당 선거 무효 선언, 오후 4시 30분 민주당 중앙당 선거 무효 선언, 3월 16일 중앙 선관위 투표율 97%발표

·3월 18일 : 대통령에 이승만(9백 63만여표), 부통령에 이기붕(8백 33만여표)공고

 

(2) 3.15마산의거

 

 

민주당 마산시장은 4할 사전투표를 확인하고 <선거부인공고>를 내건 후 데모 준비, 오후 3시 30분 데모 시작, 밤 11시 30분경 해산

경찰은 이날의 항거를 좌익분자의 사주를 받은 폭동으로 규정하려 했으 나 내외 여론과 진실에 의해 좌익의 누명만은 벋겨짐

·3월 16일 : 국무회의, 마산 데모에 형법, 국가보안법 적용키로 결정

오전 11시 30분, 민주당 중앙당사 앞에서 고교생등 5백여명 데모

마산시는 17일부터 22일까지 중고교생 등교 중지 조치

·3월 17일 : 아이젠 하워 미대통령, 한국 선거의 폭력을 개탄

·3월 17일∼30일 : 전국 곳곳에서 고교생 등 산발적으로 데모 감행

·4월 6일 : 오전 10시 민주당, 인권수호국민총연맹, 공명선거추진위원회 등 단체 주체로 데 모, 낮 12시 해산 후 학생 2천여명 데모

 

(3) 마산 2차 의거

 

 

4월 11일 오전 11시 20분,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김주열군 시체 발견, 오후 6시 30분경 3만여명으로 불어난 데모대는 자유당과 관계있는 곳을 부수며 시가지 누빔, 12일 새벽 1시 50분경 해산

12일 아침부터 다시 시위에 나서 김주열군의 시신앞에서 해산, 13일 오후에 데 모 잠잠해짐.

개각 등으로 시국 수습을 꾀하던 집권층에 2차 의거는 결정적인 타격.

·4월 12일 : 아이젠 하워 미대통령, 6월 22일에 공식 방한한다고 발표

AP통신, 한국의 데모는 민주주의 향상을 염원하는 증좌라고 보도

국회 본회의, 마산에 2차 조사단 보내기로 결의

·정부는 마산의거를 공산당 수법과 비슷하다는 등으로 검거 계속. 따라서 부산, 서울, 인천 등지에서 대학생, 고교생 데모 계속

 

(4) 4.18고려대 데모 등 대학가의 항거

 

 

18일 아침 학교에 몰래 숨어들어간 간부들은 준비 된 선전물 등을 운반, 12시 50분 점심시간, 약 3천여명의 학생들을 집하비시키고 낮1시 20분 교문을 나서 국회의사당 앞에 집결한 이들은 「대통령이나 내무장관 이 직접 나와 부정 선거를 해명하라」고 요구하며 연좌 데모 벌임.

오후 6시 40 분 자진해서 연좌 데모 피습 사건은 4.19를 폭발시킨 마지막 내관

·4월 18일 : 오전 9시 부산, 동래고 1천 3백여명 데모. 오전 11시 청주고, 청주상고, 청주공 고, 청주여고 2천여명 데모. 야간 국무회의, 데모진압에 강경책을 쓰기로 합의, 밤 12시 치안국장실에서 경찰 간부회의, 19일에 대규모 시위 예견하고 발포. 한계 등을 논의

 

(5) 피의 화요일

 

 

낮1시경 학생, 시민 10만여명은 경무대 앞에서 시위, 경찰은 무차별적 실탄 사격 감행. 오후 5시 서울, 부산 등 대도시에 비상계엄 선포

4월 19일의 데모는 거의 전국적인 규모, 부산, 광주, 대구, 전주, 청주, 인천에서 도 데모

·4월 20일 : 대구, 인천, 광주, 수원, 이리 등으로 시위 확산. 미 국무부 한국 민주화 촉구 성명 발표. 자유당, 경찰 발포 합리화하는 성명 발표

·4월 20일 ∼ 24일 :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데모 계속

·4월 24일 : 이 대통령 자유당 총재직 사퇴. 이기붕 일체의 공식 사퇴 선언

계엄사 검열 폐지와 통금 원상 회복 발표

·4월 25일 : 오전 국회 본회의, 비상 계엄 해제 결의

 

(6) 교수단 데모

 

 

서울 소재 대학 교수 258명 이 대통령 사퇴 요구, 시국 선언 발표 후 가 두 시위. 서울 시민 1만여명 철야 시위

·4월 25일 : 아이젠 하워, 미대통령 한국 방문 취소. 서울지역에 다시 비상계엄 선포

·4월 26일 : 새벽 1시 송요찬 계엄사령관, 데모 군중에 발포하지 말라고 계엄군에 지시

 

(7) 민권 승리의 날

 

 

서울 시민 3만여명 이 대통령 하야 요구 시위

오전 10시 20분 이 대통령 하야 소식 발표

오후 3시 17분 국회본회의는 이승만의 즉시하야를 만장 일치로 결정

·4월 27일 : 오전, 이승만 대통령 사임서 국회 제출, 허정 대통령권한 대행

자유당 의원 총회, 개헌 후 총사퇴를 결의함

·5월 1일 : 과도정부, 3.15정부통령선거 무효 확인

·5월 29일 : 이승만 하와이로 망명

·6월 15일 : 내각책임제 개헌안 통과

·7월 29일 : 5대 민의원 총선거

·8월 19일 : 장면 국무총리, 국회에서 인준, 제 2공화국 출범

 

3. 4.19혁명의 의미

 

첫째, 4.19는 실리주의 미만과 가치관의 전도로 인하여 가성 세대에게 무기력과 퇴폐의 낙인 이 찍혔던 젊은 세대인 학생들이 오명을 씻고 민주세력의 최선봉이라는 자각과 학생운 동의 적극적 가치를 인식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둘째, 자유민주주의의 기간인 언론, 출판, 집회, 결사, 사상의 자유 및 기회균등과 능력에 대 한 공정한 문호개방의 요구에서 나타나는 경쟁의 자유, 시민적 경제 평등의 원리를 주 장함으로써 동학이 잠정적으로 내포하고 있던 시민 사회의 건설과 그 일맥을 갖게 된 다.

셋째, 미국원조에 기생하여 성장한 매판적 독점 자본을 지지해 주던 독재 권력을 타도함으 로써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스스로 개척해야 한다는 민족주체의식이 발현되었고 민중 의 이익에 기초를 둔 자립경제를 형성할 수 있는 정치적 계기를 마련하였다.

넷째, 범국민적 결의를 다진 반독재 민중의 대열은 독재의 어떠한 혹독한 탄압, 학살, 처형 도 물리치고 궁극적 승리를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다섯째, 4.19이후의 사회운동에 정신적 활력을 끊임없이 제공함으로써 사회모순 해결에 정신 적 구심이 되었다.

 

4. 4.19혁명의 한계

 

(1) 계층적 한계

 

 

운동의 주체는 민중이다. 민중은 지배계급도 아니며, 소수 재산계급, 지식계층, 자유입자 등의 소수계급도 아닌 농민·어민·노동자를 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4.19는 이러한 민중의 직접적 행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 소수 지식층과 학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다. 설사 민중을 피지배계층 일반이라고 정의한다해도 학생계층이 피지배계층의 이해관계를 모두 포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민중은 현실 생활상의 요구에서, 학생은 정의감에서, 그 행동근거를 찾아낼 수 있다면, 단순한 정의감이 민중에 갖는 현실생활상의 이해관계와 일치한다고 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당면목표였던 정권타도가 성취되자 학생들은 질서회복만을 염두에 두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4.19가 학생계층의 주도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함은 역설적으로 운동의 적극적 담당계층이 되어야 할 민중을 포괄하는데 부족했다는 얘기가 되고, 따라서 4.19의 커다란 한계라고 아니할 수 없다.

 

(2)사상적 한계

 

 

4.19가 표방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나라의 현실조건에 부합하는 구체적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서구 특히 미국을 동경하면서 나타난 「추상적 자유민주주의」였다. 민중이 공허한 사이비에 속지 않으려면, 추상적이고 공허한 내용의 「이데올로기」를 배격하고 구체적이며 일상생활에 절실한 민주주의를 내세워야 한다.

특히 우리 나라에서는 역사적인 현실성 모순의 지양과 그를 토대로 한 새 사회건설의 접목에서 구체성을 띄어야 한다.

 

(3)조직적 한계

 

 

4.19는 광범위한 민중 각 계층의 이해관계가 집약된 조직의 총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돌발적 사태에 의한 군중조직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기존 사회조직으로서의 학생조직이 계획적 운동조직으로 전화된 것도 아니고 편의상의 즉시적 조직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은 운동주도층의 계층적, 사상적 한계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4)사회경제적 한계

 

 

4.19는 보편사적 역사발전의 전환단계로서의 혁명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의 사회경제적 동일 단계에서의 혁명이다. 4.19의 독재항거는, 이 동일 틀 위에서의 정치적 향상만을 지향한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사회경제적 단계전환으로서의 혁명이라는 관점에서는 그 한계성을 갖게 된다. 특히 우리 나라처럼 식민지적 반봉건 사회가 온존되고 있는 나라에서는 경제구조의 변동보다는 정치·사회구조의 변동이 극심하게 되므로 정치적 혁명이 우선하게 된다. 58년도 이후의 미국의 원조 삭감과 단절이 불러 일으킨 경제침체와 거기에 따른 정치적 문제의 격화에 의해서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한계가 정치, 사회, 경제, 문화 일반을 포괄할 수 있는 전면적 혁명이 아닌 정치적 혁명에만 국한되어 나타나게 한 가장 큰 요인이 되는 것이다.

 

(5)구심체의 결여

 

 

4.19를 지속적이고 효과적으로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그 이념을 정치제도화 시킬 수 있는 담당 구심체가 필수적으로 학생층과 직접 연간을 갖는다 해도, 학생층의 주장을 대변하고 이끌 수 있는 정당과 같은 구심체가 없었고, 이를 순수한 학생들이 조직하고 결성하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이것은 학생층의 이념이 구체성과 현실성을 결여했다는 점과 기존정당의 부패와 이념 결핍, 그리고 4.19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 새로운 정당을 결성하려고 한 계층도 없었던 점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5.4.19혁명의 계승

 

(1)시민혁명으로서의 의미

 

 

4.19묘지를 국립묘지로 만드는 준공식에서 대통령은, "시민들이 즐겨찾는 이곳이 독재와 불의에 항거하는 민주주의 정신을 배우는 산 교육장이 될 수 있도록 정성껏 가꾸어 주기 바란다."는 연설을 하였다. 4.19혁명은 정치적으로 민주시민 혁명으로서 독재정권을 시민의 힘으로 무너뜨린 쾌거였다. 이를 계승하여 사회 여러부분을 지속적으로 민주화해 나가는 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2)평화 통일의 의미

 

 

국토와 민족의 분단으로 인해 우리 나라는 엄청난 분단 비용을 감수해 왔다. 분단 현실에서 기득권을 누리는 사람도 생겨났고, 젊은 세대들은 통일에 점점 무관심함 성향을 보이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1961년 4.19혁명 1주년 기념대회부터 본격화된 통일 열망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4.19는 이승만 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주의 운동으로 출발했으나 민주당 정권이 수립된 후에는 "오라 남으로! 가자 북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를 외치며 우리 민족의 최대의 고통인 분단을 극복하는 통일 운동으로 나아간 것이다. 분단이라는 걸림돌을 제거하고 민족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는 것은 아직도 우리 시대의 과제이다.

 


 
가져온 곳: [나를 위해,그리고 이나라를 위해]  글쓴이: 조성환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