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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8>광해군- 實事求是의 리더십

아이네로 2005. 3. 28. 10:02

왜란 겪으며‘백성보호가 최우선’절감
明·淸교체기 등거리 외교로 전쟁 줄여

광해군(1575~1641,재위 1608~1623)이 살았던 시대는 격변기였다. 1592년부터 7년에 걸친 임진왜란으로 조선은 온 국토가 전쟁터였다. 백성들은 전쟁과 기근, 질병으로 수없이 죽어나갔다. 사대부 지배층 역시 가문과 정파의 부침이 계속됐다.

국외적으로는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돼가는 동아시아의 엄청난 국제적 소용돌이가 꼬리를 물고 닥쳐왔다. ‘화려한 중심(中華)’으로 표현되는 격조 높은 문명을 기반으로 중국족이 주도해 온 정치 문화가 ‘철의 군대(鐵騎)’로 표현되는 강한 힘을 기반으로 여진족이 주도하는 정치 문화로 바뀌고 있었다. 당시의 변화 속도와 폭은 요즘 기준으로 따지면, 소련과 동구권 붕궤로 인한 국제 질서의 재편과 디지털 혁명으로 이어지는 세계 문명의 대전환과 견줄 만했다.

이런 격변기의 지도자였던 선조는 무능했다. 그는 궁궐 밖에서 백성과 섞여 지내다 임금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기대와 달리 시대 변화를 읽어내지 못했다. 특히 백성과 너무나 거리가 멀었다. 왜란이 터지자 백성들은 물론 우방국 명나라조차 그를 못마땅해했다. 광해군은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다.

피난지 평양에서 열일곱살에 세자에 책봉된 그는 작은 정부를 이끄는 작은 임금으로서(分朝), 최전선으로 가서 일반 백성과 함께 왜란의 현실을 피부로 맞닥뜨려야 했다. “군사와 군정의 권한을 맡기니 (국가) 부흥의 큰 소원을 이룩하기 바란다.…(그리하여) 부자가 다시 만나 기뻐할 때가 속히 오기를 목 빼어 기다리노라.” 광해군을 떠나보내며 선조가 내린 조서다. 아버지 선조와 피울음을 흘리며 기약없는 이별을 해야 했던 광해군은 무엇보다 백성들에게 국가와 정부가 존재하고, 같이 생존하려 하고 있음을 알려야 했다. 훗날 광해군의 실사구시(實事求是) 외교와 정책은 백성들의 참상을 함께 겪은 군주였기에 가능했다.

광해군은 반대를 무릅쓰고 왜군 주력부대가 점령한 평양성 북방의 최전선 영변을 가로질러 정주를 거쳐 해로로 해주에 도달했다. 거기서 육로로 왜군이 우굴거리는 산야를 가로질러 7갈래 길이 합쳐지는 위험 지역인 경기도 이천까지 내려갔다. 여기서 전국에 격문을 띄워 의병 봉기를 권유했다. 특히 강화를 거점으로 해로로도 정부 명령이 통하도록 했고, 전라도 지역을 방문해 군량 준비를 독려했다.

이 과정에서 광해군은 식량이 떨어지는 위기까지 겪었다. 나라의 멸망을 막으려면 세자에게 전위해야 한다며 선조에게 잇달아 상소문을 올리는 의병장들의 반발도 무마시켜야 했다. 광해군은 격무와 심신의 피로 때문에 해주에선 오륙개월을 앓아 누울 정도로 녹초가 됐다.

당시 영변, 전주 등지에서 광해군이 맞닥뜨린 백성의 현실은 참혹했다. “명나라 병사 한 사람이 취하고 배가 불러 지나가다가 길 가운데서 구토를 하였는데 굶주린 백성 천백명이 일시에 달려가서 머리를 모아 주어먹는데 약한 자는 달려들지 못하고 물러서서 눈물만 흘렸다.” 남원 출신 의병장 조경남(趙慶男)이 남긴 진솔한 기록이다. 백성 입장에서 보면 명나라 군대의 주둔은 또다른 재앙이었다. 명나라 군사의 군량을 대기 위해 조선의 백성들이 죽어나간 것이다. 이때문에 전쟁 중에도 불구, 송유진이나 이몽학 등이 이끈 농민봉기가 터져 나왔다.

청나라가 흥기했을 때, 광해군은 외교적으로 ‘화려한 중심(中華)’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철의 군대(鐵騎)’를 선택할 것인지 기로에 놓였다. 명나라에서 여진족 정벌을 위한 원병을 계속 요청했을 때, 고위직 신하들의 합의 기관인 비변사는 “우리나라는 중국에 대해서 부자(父子)의 의리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원병 요청에 응할 것을 제시했다. 전쟁의 참화를 백성들과 함께 겪은 광해군은 대의 명분 때문에 군사를 동원할 수는 없다는 태도를 분명히 했다. “훈련되지 않은 군졸을 적의 소굴로 몰아넣는 것은 양떼를 가지고 호랑이를 공격하는 것과 같다…우리나라 입장에선 도리어 (우리 땅을) 수비하지 못하게 되는 근심만 생길 것이다.” (광해군 실록 10년 4월 무인)

광해군은 정확한 정보를 바탕으로 상황 판단을 내리기 위해 모든 수단과 정보원을 동원했다. 명나라에는 경솔하게 징벌하지 말고 다시 헤아려 보라는 조언을 했다. 하지만 거센 압력으로 조선군은 결국 파병됐다. 광해군은 적극적으로 싸움에 나서지 말도록 지시했고, 예상대로 조·명 연합군은 청나라 군사에게 참패했다. 광해군은 전사한 김응하 장군을 표창하는 동시에 청에 항복한 강홍립 장군의 가족들은 지켜줬다. 그리고 명의 계속되는 재파병 요구는 거절함으로써 여진족의 예봉을 피하려 노력했다.

광해군은 당시 통치 현실에 적용되는 실사구시는 무엇보다도 ‘생존’, 곧 ‘백성의 보호’라고 판단했다. 대국의 인물답지 않게 인정(人情·곧 뇌물)이 잘 통하는 명나라 장군, 고위관료들의 실제 모습을 본 광해군은 ‘화려한 중심’의 명나라가 내부분열에서 비롯된 농민농기로 비참하게 몰락하는 것을 예견했을지도 모른다.

정치적 명분이란 백성을 위한 것인가, 국왕 또는 사대부를 위한 것인가. 분명한 것은 사대부의 쿠데타군에 얹혀서 즉위한 인조는 ‘국가를 다시 만들어준 은혜(再造之恩)’를 지킨다 하여 병자호란이라는 전쟁의 참상을 자초했다. 하지만 백성에게 얹혀서 정통성을 확보한 임금인 광해군은 이런 전쟁을 막아내기 위해 성심성의를 기울였다. 당시인의 말을 빌리면, 최선의 정보를 바탕으로 ‘현실과 동떨어지게 맞는 바른 논의’ 보다 ‘현실에 칼날같이 맞는 바른 논의’를 선택했다. 이것이 바로 백성의 생존을 우선한 광해군의 리더십이다.

광해군은 동생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유폐하는 등의 정치적 무리수 탓에 실패자로 기록됐다. 그러나 백성들의 생존권을 앞세운 광해군의 실사구시의 리더십은 요즘 지도자들의 덕목에 가장 어울리는 게 아닐까.

(박광용·가톨릭대 교수·국사학)


광해군에겐 柳夢寅이 있었다

「어우야담」의 저자로 유명한 유몽인(柳寅·1559~1623)은 왜란 때 광해군이 이끄는 ‘작은 정부’(분조·分朝)를 따라다니면서 활약했다. 이런 인연으로 광해군 즉위 후 이조참판을 거쳐 대제학에 올랐다. 당대의 문장가였던 그는 은을 채굴하고 화폐를 사용하며, 선박과 수레를 사용하고 상설점포를 개설하자는 등 32가지의 경제개혁안을 바탕으로 여진족을 방어해야 한다고 건의한 실사구시적 경세가였다. 하지만 광해군이 영창대군을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시키는 난맥상을 보이자 초개같이 벼슬을 버렸다. 그는 고사리로 연명한 백이 숙제의 옛 이야기를 따라 산속에 은거했다.

그럼에도 인조반정 후 유몽인은 폐주 광해군에게 절의를 지키려했다 하여 역적으로 몰려 처형된다. “흰 머리에 젊은 태도 꾸민다면 어찌 연지분이 부끄럽지 않으랴”고 당시 그가 읊은 상부사(孀婦詞)는 특히 유명하다.

후일 정조는 유몽인을 복권시키면서, 세속의 명리를 헌신짝같이 보는 백이 숙제와 같은 인물로 추켜세웠다. 정조는 단종 때의 김시습이 웅장한 설악산과 같다면 광해군 때의 유몽인은 화려한 금강산과 같다고 평했다.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으며 하나는 강개하고 하나는 조용하다는 차이가 있지만, 원칙을 굳게 지킴과 마음의 정성스러움은 같다는 것이다.

(훗날 복위된) 단종을 위해 원칙을 지키면서 할 말을 제대로 한 김시습만이 후세 역사에서 복권되고 충신으로 기록되는가. 아니다. (복위되지 못한) 광해군을 위해 원칙을 지키면서 할 말을 제대로 한 유몽인 역시, 후세 역사에서 복권되고 충신으로 기록된다. 전통시대 조선 사람들이 지켜낸 역사공동체는 이런 수준이었다.


광해군의 참모그룹은 北人들

광해군 정권을 보좌한 핵심 참모들은 임진왜란 당시 가장 강력한 의병을 이끈 정치 집단인 ‘북인’(北人)당의 인재들이었다. 이들은 의병을 일으켜서 진주를 거점으로 경상남도 지역을 지켜냈다. 그리하여 전라도에 거점을 둔 이순신 수군을 보호하고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을 보전하도록 한 최대 공로자이기도 하다. 학맥으로 보면, 이들은 진주와 김해 지역을 거점으로 하는 남명 조식(曺植·1501~1572)의 제자들이었다.

조식은 방울과 칼로 자신을 수양한 사람으로 유명하다. 칼을 품고서 칼날같이 행동하지만, 방울을 달고서 방울소리 하나 안 나게 행동거지를 삼가했다. 이런 스승의 엄격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그들 속에도 세칭 ‘소인배’들이 섞여 있었다. 이때문에 광해군의 통치가 영창대군 살해와 인목대비 폐비 등 정치적 무리를 빚어 몰락하는 화근을 빚기도 했다.

 

 

[출처 - 푸른장미의 사랑]


 
가져온 곳: [♥생을 그리는 작업실♥]  글쓴이: 글짱 바로 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