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帝王들의 성공학] <6>의자왕의 근시안적 리더십
집권초 성공에 자만… 국제정세 변화 못읽어
주위에 ‘人의
장벽’… ‘바른말하는 참모’ 사라져
낙화암에서 몸을 던지는 삼천 궁녀들. 백제의 최후를 상징하는 비극적 장면이다. 사실 660년 나·당 연합군의 공격 아래 무릎을 꿇은 백제의 운명은 낡은 국가체제와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재편 등 구조적 이유가 크다. 하지만 당시 백제 최고 경영자였던 의자왕(재위 641-660)의 판단과 행동 여하에 따라 최소한 망국의 시기를 늦출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에게 책임을 묻는 이유는 이때문이다.
삼천궁녀의 치마폭에 놀아났다는 후대의 평가와 달리, 의자왕은 태자 시절 ‘해동의 증자(曾子)’란 평판을 들을 정도로 효도와 우애를 다한 반듯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 무왕(武王)은 640년 당나라의 ‘국학’에 젊은 인재들을 파견, 선진 학문(유학·儒學)을 공부하게 한 개명 군주였다.
‘삼국사기’는 의자왕이 “크게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로서의 자질에 덧붙여 영웅의 기상을 가졌음을 전하는 대목이다. 의자왕은 즉위 후 곧 바로 권력체제를 정비하고, 642년 신라로부터 옛 가야 지역의 40여 성을 빼앗아서 영웅다운 면모를 과시했다. 이렇게 영웅적인 그가 왜 저항다운 저항을 해보지도 못하고, 이역만리 당에 끌려가서 큰 한을 품고 죽고 말았을까? 당과 고구려의 대결투에서 유탄을 맞아 그렇게 됐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의자왕의 리더십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있다.
태자 시기 그는 상당한 자제력을 갖춘 인물이었고, 용기와 담력 그리고 추진력까지 겸비했다. 하지만 넓은 시야나 미래에 대한 비전이 없는 ‘근시안적(近視眼的) 리더십’이 문제였다. 즉, 재위 초반 성공이 쌓이면서 자만에 빠져 점점 주위 사람들과의 교감을 잃어가고 국제관계에서도 장기적인 안목을 갖지 못한 채 나라의 멸망을 초래했던 것이다.
의자왕은 40대에 들어서서야 왕위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그는 ‘준비된 군주’였다. 즉위하자마자 그는 적극적으로 정치·군사적
이니셔티브를 취했다. 즉위 이듬해인 642년 왕권에 장애가 될 수 있는 유력한 왕실 인사들과 고위 귀족 40여명을 섬에 귀양보내고 친위체제를
확고히 다졌다. 그리고 진흥왕에게 당한 성왕의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심과 공명심에 불타 직접 군사를 지휘하여 신라의 40여성을 빼앗았다. 이어
장군 윤충 등을 보내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성주(城主)로 있던 신라의 요충지 대야성을 함락했는데, 이때 백제군은 성주 내외를 위시해 수많은
항복한 자들을 죽였다.
![]() | |
▲ 백제가 멸망하자 삼천궁녀가 몸을 던졌다는 부여 낙화암./조선일보 DB사진 | |
의자왕은 자신의 친·인척들로 구성된 인(人)의 장벽에 포위돼있었다. 충성스런 신하들까지도 왕과의 연결이 차단될 수밖에 없었다. 재위 후반기에 정치상의 혼란을 가져온 가장 두드러진 일은, 향락의 늪에 빠져서, ‘일본서기’에 보이는 대로, 후궁의 하나였을 군대부인(君大夫人)에게 국정을 농락당했다는 점이다. 보다못한 좌평(佐平) 성충(成忠)이 656년 이를 비판하고 나섰지만, 결국 그는 옥에 갇혀 굶어죽었다. 이후 왕에게 바른 말을 하는 신하가 사라졌다. 의자왕은 이 사건 이듬해인 657년 왕자 41명에게 좌평의 벼슬을 주고, 식읍(食邑)을 내렸다. 배는 침몰하고 있는데, 가족 잔치만 베풀고 있는 격이었다.
내치(內治)에서의 자만과 아집 그리고 독재는 대외적으로는 안목과 전망이 부재한 근시안적 외교를 가져왔다. 즉위 초 그는 고구려에서 막 쿠데타에 성공한 연개소문과 화친을 맺고 신라에 대한 공세를 늦추지 않았다. 의자왕은 당 태종의 공격을 물리친 고구려의 힘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다. 이웃한 세계제국 당과의 외교 관계는 사활이 달린 문제였으나, 그는 이를 소홀히 했다.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여 일본과의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선에서 만족했던 것이다.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의자왕은 재위기간 내내 고구려의 후원을 믿고, 당의 만류를 무시한 채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강행했다.
하지만 삼국간의 힘의 관계는 각 나라의 국력만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니었다. 삼국 상호간의 외교관계는 물론, 중국과 일본과의 관계도 중요한
변수였다. 당시 중국의 통일왕조인 당의 국력은 막강했다. 하지만 그는 고구려의 국력을 지나치게 높이 평가한 나머지, 눈앞의 이익에 사로잡혀
신라를 멸망 직전까지 몰아부쳤다. 이런 과욕이 신라로 하여금 당을 끌어들이게 하는 결과를 가져왔던 것이다.
![]() | |
▲ 김기흥 교수 | |
작은 성공에 취해 국제적인 큰 변화를 깨닫지 못했던 의자왕은 700년 역사의 종말을 재촉한 군주로 역사에 기록됐다.
(金基興·건국대 교수·한국사 hiskkh@hanmail.net )
[출처 - 푸른장미의 사랑]